[조선왕릉-인릉] 세도정치의 시발점, 순조
조선 제23대 임금 순조(純祖, 1790~1834년)는 헌종, 철종과 함께 3대 60년간 진행된 세도정치로 대변되는 인물이다. 정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수빈 박씨이며, 이복형인 문효세자가 5살에 요절하자 1800년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같은 해 정조가 죽자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고, 1803년까지 정순왕후 김씨, 1804년까지는 장인인 김조순이 섭정하였다. 1804년부터 친정을 시작하였지만, 재위기간 그는 안동 김씨 세도가문에 눌려 제대로 된 국정운영 한 번 해보지 못했으며 후대에 순조는 ‘세도정치’와 ‘천주교 탄압’ 두 가지로 기억될 뿐이다.
세도정치와 천주교 탄압으로 얼룩진 재위 기간
인릉에는 재위기간 내내 안동김씨 세도정치에 눌려있던 순조가 잠들어있다.
본래 세도정치는 ‘사회를 교화시켜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나 방도’로 사림세력이 추구하는 이상적 통치 원리를 뜻했으나 조선 후기에 특정 가문이 권력을 장악하고 무소불위로 휘두르면서 ‘왕에게 전권을 위임받은 특정인이나 특정 가문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형태’라는 뜻으로 더 많이 쓰이게 되었다. 순조의 재위기간은 세도정치의 두 번째 뜻이 더 널리 쓰인 시기였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순조를 대신해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안동 김씨에 의한 세도정치는 시작되었다. 어린 순조를 걱정해 정조는 세상을 떠나면서 김조순에게 순조의 보필을 부탁한다. 어릴 적부터 기량과 식견이 뛰어났던 김조순은 곧은 성품으로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딸을 순조의 왕비로 들여 보필하게 하는데 그녀가 바로 효명세자(훗날 익종으로 추존)을 낳은 순원왕후다. 그렇게 안동 김씨 가문은 권력의 가장 높은 위치에서 정국을 주도했다. 흐르지 않는 물은 썩기 마련이라 했던가. 중앙의 모든 요직을 독점했던 안동 김씨에 의해 부정과 부패는 극에 달했으며 출세를 위해서는 안동 김씨 가문에 줄을 서야만 했다. 이는 과거제도의 문란과 조세체계까지 무너뜨리는 국가 전체의 위기 상황을 초래했다. 조선 후기 사회의 몰락을 가져온 ‘삼정의 문란’이 시작된 것이다.
순조가 친정(親政)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세도정치에 찌든 사회를 다시 정화하기란 쉽지 않았다. 여기에 1811년 서북쪽 사람에 대한 차별 철폐를 주장하며 평안도 일대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을 시작으로 전국 곳곳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나면서 조선에 불어닥친 혼란의 바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농민봉기는 세도정치 내내 끊이지 않았다.
순조와 순원왕후의 인릉은 여러가지 비석들이 지키고 있다.
순조 때는 정치적 혼란뿐만 아니라 종교적 혼란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대두하기도 하였다. 중국으로부터 학문의 일종으로 들어왔던 천주교는 ‘서학’이라 불리며 조선 내 시파 세력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있었다. 그러나 ‘만민 평등’을 주장했던 천주교의 이념은 성리학 국가인 조선에 탄압의 대상이었다.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했던 정조와 달리 자신들의 권위를 위협하는 체제를 용납할 수 없었던 세도가문은 천주교도를 철저히 탄압했다. 특히, 1801년 정적이었던 시파를 제거하기 위해 벽파는 사교금압(邪敎禁壓)의 명분으로 천주교도뿐만 아니라 시파의 주요 인물들을 처형하거나 유배 보냈다.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승훈과 정약용의 형 정약종 등이 처형되었고, 정약용은 관직을 빼앗기고 유배를 떠나야 했다. 이것이 바로 조선의 천주교 탄압의 신호탄인 신유박해(辛酉迫害)이다. 순조가 친정(親政)을 시작한 후에도 천주교 탄압은 계속되었다.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순조의 집권기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여기에 이양선(異樣船)의 잦은 출현은 내부적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조선에 곧 다가올 어두운 운명을 예고하는 것과 같았다.
순조는 세도정치와의 깊은 악연을 끊고자 1827년 효명세자(훗날 익종으로 추존)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함으로써 안동김씨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으나 갑작스러운 세자의 죽음으로 그의 마지막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국, 순조는 1834년 나라 안팎의 혼란을 잠재우지 못한 채 34년의 재위기간을 끝으로 세상을 떠났다.
[트래블아이 왕릉 체크포인트]
순조와 그의 비 순원왕후가 잠들어있는 인릉(仁陵)은 하나의 봉분 안에 왕과 왕비가 잠든 합장릉이다. 본래 순조는 파주장릉(長陵) 부근에 자리를 마련하여 안치되었으나 풍수지리상의 이유로 지금의 자리로 이장되었다.
옆에 위치한 태종과 원경왕후의 헌릉은 쌍릉형식으로 조영된 반면 인릉은 단릉으로 조영되어 있어 서로 비교하면서 보면 좋다. 또한, 병풍석과 난간석을 모두 두른 헌릉에 비해 인릉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둘려 있다. 단릉형식의 인릉은 혼유석(무덤 안의 영혼이 나와서 놀 수 있도록 만든 돌) 역시 하나이며 장명등은 팔각등 양식으로 조각되어 있다. 서울 한가운데 마치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처럼 차가운 회색빛 건물 일색인 도시와는 다른 푸른 자연을 보여주는 인릉은 혼란의 연속이었던 순조의 재위 기간과는 달리 잘 정돈된 모습으로 우릴 맞이하고 있다.